Contents
중세의 스포츠와 오락
중세 귀족 사회의 스포츠
중세 유럽 귀족 사회의 대표적인 스포츠는 토너먼트였다. 사냥과 매사냥, 검술 게임, 그리고 조직화되지 않은 형태의 구기운동 등이었다.
토너먼트는 봉건사회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축전이었으며, 전쟁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초기 귀족들은 토너먼트에 참가하기도 하고 관중으로서 기사들의 경기를 관전하며 즐기기도 하였다.
쥬스트는 토너먼트 애호가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토너먼트 경기의 특성으로 인하여 쥬스트가 점차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토너먼트의 애호가들도 점차 쥬스트 경기로 이끌렸다. 쥬스트는 종종 왕실의 결혼식 행사나 그 밖의 기념식 직후에 열리는 여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영국의 경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햄프턴 궁전(Hampton Court), 그린위치(Greenwitch) 등지에 쥬스트 경기장(tilt-yard)이 마련되었다.
그 외 중세 귀족 사회에서 성행한 스포츠는 사냥과 매사냥, 볼게임 등이었다. 양궁은 스포츠로서, 전쟁의 훈련으로서 매우 장려된 스포츠였다. 사냥은 필드 스포츠(field sport)로서 귀족들의 여가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활동이었으며, 사냥의 활성화와 함께 궁술도 발달되었다. 영국에서는 왕의 사냥터는 ‘포레스트(Forest)’, 또는 ‘베너리(Venery)’라고 불렀으며, 주로 사슴, 멧돼지, 늑대, 토끼 등과 같은 사냥감이 흔한 지역을 사냥터로 지정해 두고 있었다. 귀족들의 사냥터는 여우 • 담비 • 이리 등이 흔히 잡히는 곳으로 체이스(chase) 또는 파크(park)라고 불렀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구기는 핸드볼이나 테니스 유형의 구기운동이었다. 핸드볼(hand ball)이라고 기록된 공놀이는 주로 교회의 벽에 손으로 공을 치는 형태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유형의 놀이는 오늘날 론 테니스(lawn tennis)나 스쿼시(squash) 등과 같은 스포츠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에서 손으로 하던 공놀이(handball)로 추정되는 ‘쥬드(Jeu de Paume)’이었다.
중세 서양 서민 사회의 스포츠
중세를 체육의 암흑시대, 또는 기사체육의 시대라고 하지만 중세 초기부터 서민 사회에도 다양한 놀이가 존재하였다. 중세에 성행했던 구기는 핸드볼(hand-ball), 볼링(bowling), 파이브즈(fives), 거친 형태의 축구(rugged ball games), 당구(billiards) 등과 라켓이나 클럽으로 공을 치는 크로켓(croquet), 밴디볼(bandy-ball), 클럽 볼(club ball), 트랩 볼(trap ball) 등이었다. 거친 형태의 축구는 소울(soule)이라 불리던 놀이였다. 이 게임은 주로 황무지나 개인 소유의 장원에서 볼 수 있었으며, 매우 난폭한 모습도 엿볼 수 있는 집단적인 공놀이였다.
민중의 생활 속에는 유혈 스포츠(bloody sports)도 성행하였다. 곰몰이(bear-baiting), 투계(cock-fighting) 등은 로마지배시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성행하였다. 중세 영국의 경우 동물의 학대虐待)와 연관된 유혈 스포츠가 민중의 생활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수퇘지(boar)싸움, 소몰이(bull-baiting), 곰몰이(bear-baiting), 투계(cock-fighting), 닭 때리기(throwing at cocks) 등과 같은 동물 학대 유형의 유혈 스포츠가 성행하였다.
중세 중국의 스포츠
어느 대륙이나 인간의 놀이 문화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중세 중국에서도 스포츠 성격을 지닌 다양한 놀이 문화가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놀이는 마구, 축국, 투호, 상박, 무용 등 미조직화된 형태의 레저스포츠였다.
마구는 일종의 폴로였으며, 페르시아로부터 터키 등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시대의 황제들은 마구의 명수들이었다고 한다. 마구경기장은 길이 1,000보, 폭 100보였으며, 경기자 수는 제한될 경우도 있고, 제한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축국(축구)도 존재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두 종류의 축국이 있었다. 하나는 국역(鞠域, 운동장)이 필요하지 않는 유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문(골대)이 있는 유형이었다. 당대에 와서 인기 있는 놀이로 등장하여 문인학사(文人學士)들도 축국을 즐겼다고 한다. 송나라시대에 발간된 《축국도보(蹴鞠圖譜)》에는 1인장(一人場, 1인제)부터 9인장(九場)까지의 여러 가지 경기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상박(相)은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성행하였다. 《수서(隨書)》에는 천하의 명인들이 모여 상박을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말기에 나온 《각력기(角力記)》에는 “진서에 상박(相撲)은 하기(下)라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정월에 상박을 하여 기를 겨루는데, 그 폐단이 커서 이를 금지시키자는 상소가 올라갔다는 기록도 있다.
중세의 체육사상
신체 문화의 쇠퇴 배경
중세라고해서 인간의 신체활동과 관련된 문화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교육으로 신체적인 활동이 있었고, 민중의 생활 속에 놀이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고대와 근대 사회와 비교해볼 때 체육은 암흑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며, 각종 신체문화는 쇠퇴하였다. 그러한 상황이 전개된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 후기의 심신 이원론적 사고
둘째, 신체는 사악한 것이라는 금욕주의적 사고
셋째, 로마시대 운동경기가 이교(異敎)와 관련이 있다는 인식
넷째, 로마시대 비천하고 저속한 스포츠나 운동 경기에 대한 반감
이와 같은 요인으로 인하여 중세에는 체육활동이 활성화될 수 없었으며, 신체 문화도 쇠퇴하였다. 교육 또한 교리 학습과 금욕적 수도생활과 연관된 내용에 국한되어 조직화된 체육은 생각할 수 없었으며, 고대 사회로부터 전승되어 왔던 많은 신체 문화도 쇠퇴하였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육사상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사상은 중세 많은 신학체계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의 복지증진을 위해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중시하고 오락의 중요성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st)》에서 “행복을 얻는데 있어서 영혼과 육체의 완벽함이 요구되며,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 건강한 신체(wellbeing body)가 요구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지성은 부분적으로 육체에 의존한다고 보았으며, 지적인 자산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의존할지라도 감각적인 힘이 육체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아퀴나스가 정신을 육체보다 더 우위에 둔 것은 사실이지만 건강한 정신과 건전한 육체 모두 인간이 소유해야 할 바람직한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체육사적 의미를 지닌다.
참조: 르네상스시대의 체육
르네상스시대의 스포츠 – Sports History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